오답투성이의 삶이지만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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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는 이에게
[53글] 올해 1월 새로 비딩 하는 제안 건이 있었다. 입사한 지 3개월이 안 되었을 때라 회사 분위기도 잘 모르던 그때, TFT로 제안팀이 꾸려지면서 각 팀에서 한 명씩 차출되어 제안서를 함께 쓰게 되었다. 서먹할 틈도 없이 달리던 우리들은 며칠 밤을 새하얗게 불태우며 비딩을 마친 후, 조만간 밥 한 번 먹자고 약속하고 각자의 현업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각자의 현업에 치이면서 나는 회사에 적응을 해나갔고, 그렇게 꼭 10개월이 지났다. 오늘 오후에 그때 그 제안팀 친구 중 한 명을 만났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며 퇴사 인사를 건넸다. 다른 부서의 사람이라 왜, 어떤 이유로 퇴사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캐물을 위치나 관계도 아니지만, 그때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올라 아쉬웠다.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2024.11.21 -
은행나무
[52글] 강남 부근 세관사거리에는 가을만 되면 은행나무 열매로 악취를 풍기는 구역이 있다. 잠시 외출을 했다가 그 길을 지나는데 '웬일로 이렇게 깔끔해?' 이러고 나무를 보니, 세상에나... 잔가지를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가지가 몽땅 잘려있다. 건물주의 우격다짐이든, 폭발하는 민원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공무원이든 누군가의 분노가 몇 남은 잔가지에 아직 서려있는 듯했다. 사무실에 돌아와 오늘은 이걸 소재로 쓸까 고민하다가 챗GPT에게 '은행나무 가지치기'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서 글을 써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의 글은 챗GPT의 글로 갈음하기로 한다. - '은행나무 가지치기'라는 주제로 블로그 타입의 글을 써줄 수 있을까? ..
2024.11.20 -
겨울바람
[51글] 그제 내린 비로 마른 가지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남은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젖은 땅에 들러붙은 낙엽을 떼어내느라 아침부터 아파트 앞을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의 비질 소리가 분주하게 들린다. 11월이고 비도 내렸지만 생각보다 안 춥다 싶었는데,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올라와 창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훅 들이친다. 아이들이 다니는 아파트 맞은편 초등학교 건물이 눈에 보이자 꼬맹이들은 단디 입고 갔나 걱정을 잠시 했다가 마침 어제 새로 산 패딩을 입혀 보냈다는 아내의 말이 떠올라 안심이 됐다. 오늘 부는 바람은 그리 세지 않지만 겨울이 물씬 담겨있다. 문 앞을 나설 때 '헙!'하고 숨을 잠시 멎게 하는, 춥다기보다 뚝 떨어진 기온으로 놀람에 가까운 감탄사가 나오게 하는 딱 그 정도의 상쾌한 겨..
2024.11.19 -
밤 운동
[50글] 퇴근을 한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밖을 나선 지 한 달이 넘었다. 퇴근을 하면 대게 밤 9시 이후지만 그래도 30분씩 집 근처 산책로를 뱅글뱅글 걷는다. 처음에는 '생전 운동 안 하던 얘가 왜 이러는 거지?'하고 거부하던 몸뚱이가 무릎과 발목을 고장내기도 했지만 괜찮아지면 또 나가고를 반복하니 이제 몸이 좀 적응을 한 듯싶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가는 날이면 최근 못 나눈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혼자 나갈 때면 이어폰을 챙겨 나간다. 깜빡하고 이어폰을 챙기지 않은 날에는 산책로를 흐르는 물소리와 자박자작 걷는 내 발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퇴근 후 운전해서 집으로 오는 내내 오늘은 어떤 루트로 산책을 할까 고민이 된 걸 보니 이제 밖을 나서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나 보다. 집에 도착하..
2024.11.18 -
제주식 돼지불백
[49글] 며칠 전 신사역 부근에서 일을 하는 형님을 가로수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애플스토어 가로수길에서 볼일이 있어 나가는 김에 점심쯤 식사 약속을 함께 잡았다. 볼일을 마친 후 형님이 가보고 싶다는 식당이 있다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오늘의 메뉴는 '제육볶음'. 제육볶음, 김치찌개, 된장찌개... 회사 근처에는 이런 백반류를 파는 식당이 없다. 예전 회사 근처에는 괜찮은 백반집이 있어 하루 걸러 한번씩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간만의 제육볶음이라니 반갑다. 고기가 제주도에서 온 건지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간판이 '제주식 돼지불백'이다. 이곳 식사류는 딱 제육볶음만 있다. 보통 단일 메뉴로 음식을 내는 식당은 컨셉이거나 이 음식에 자부심이 있는 경우인데, 이 집은 확실히 후자다. 철판에 어느 정..
2024.11.17 -
야근
[48글]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팀원들과 서둘러 회사를 뛰쳐나왔다. 퇴근이면 좋겠지만... 불금이지만... 태산처럼 쌓인 할 일을 두고 퇴근할 수가 없는 처지. 그래도 괜찮다. 오늘의 야근 식사는 삼겹살이니까. 먹기라도 잘 먹어야지. 밖을 나오니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떠 있다. 하... 달이 휘엉청 떠있는데도 퇴근을 못하는구나. 씁쓸한 현실이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누굴 탓하랴. 그래도 밤 깊은 야근은 이제 한 달 정도만 바짝 하면 되니 그에 위안을 삼는다. 겨울 초입인데 완연한 봄 날씨다. 걸쳐 입고 나온 후드티를 벗어 들고, 우리를 따라오는 보름달을 가끔씩 올려다보며 회사에서 좀 떨어진 삼겹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2024.11.16 -
제안 시즌
[47글] 바야흐로 제안 시즌이 다가왔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광고대행사는 내년 한 해 먹고 살 농사를 시작하는데, 11월과 12월은 오롯이 제안을 준비하고 발표하는데 시간을 써야 한다. 보통 12월까지 계약이 된 광고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무는 실무대로, 시간을 쪼개 제안까지 투입되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예상대로 11월이 되자 제안요청서(a.k.a. RFP)가 쏟아진다. 올해에 이어 계약을 연장하는 '방어 PT'는 물론, 우리 회사와 잘 어울리고, 좋은 레퍼런스가 되며, 수익성까지 괜찮은 '신규 광고주 영입'을 위한 과업을 고른다. 본부에서 진행하기로 한 6개의 제안 건 중, 우리 팀에서는 2개의 제안에 참여하기로 했다. 지난해 처음 수주한 프로젝트의 방어 PT 건과 지난 해 다른 ..
2024.11.15 -
군고구마가 제철
[46글] 겨울이 되면 빼놓지 않고 찾는 게 있다. 군고구마. 원래 고구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군고구마 맛집을 우연찮게 찾은 후로 매년 같은 곳에서 사다 먹는다. 사뭇 추워진 걸 보니 이제 제철이 왔구나 싶다. 논현동 모처의 카페에서 겨울이 되면 군고구마 기계가 돌아간다. 예전 회사가 이 근처라 알게 된 곳인데, 커피를 주문하니 서비스로 주신 군고구마에 매료(?)되어 그 뒤로는 겨울 내 서너 번은 일부러 찾아가 사 먹는 곳이 되었다. 카페 사장님은 마케팅 천재인 게 분명하다. 올해 2월쯤 군고구마 생각에 주문하려고 연락을 하니 '이제 군고구마 끝났어요, 겨울에 다시 합니다'라고 해서 아쉬웠는데, 지난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궁금해 전화를 하니 막 개시했다고. 그래서 오늘은 구황작물을 애정하는 팀..
2024.11.14 -
맵찔이
[45글] 어제는 야근식대로 씹을 거리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평소에 잘 사지 않는 과자를 몇 개 주워 담아 계산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과자 봉지에 고추가 그려져 있다. 심지어 태국산이다. '아, 이건 내가 못 먹는 거구나, 와이프 가져다줘야지~'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얼마나 매워요?'라고 물으면 보통 '신라면 정도예요, 신라면 보다 조금 매워요' 정도로 답하는 걸 보니 이게 기준인 듯하다. 나는 딱 신라면 정도가 딱 한계다. 먹을 때 고통스럽고 힘들다. 아,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배탈 후폭풍이 2~3일을 가다 보니 매운 음식은 가급적 피한다. 예전에 집에 놀러 온 처제와 간장 반, 고추장 반 찜닭을 시켜 먹는데, 내가 매운 쪽에 손을 안대니 처제가 '..
2024.11.13 -
선택하지 않은 길
[44글] 살다 보면 과거에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의 끝에는 무엇이 펼쳐졌을까 하는 궁금할 때가 있다. '수많은 선택들의 모음집'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 말이다. 그런 궁금증은 아마도 전 인류적, 세대적인 공통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영화나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다루는 '평행이론'이란 소재는 이제 진부한 클리셰가 되고 있다. 오래전 방송 프로그램 속 A와 B 선택지에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는 모습은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라면 기억하는 장면일 듯 하다. 가지 않은 길의 끝에 놓은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얼마 전 애플TV에서 '30일의 밤'을 시청한 후, 도서관에서 원작 소설..
2024.11.12 -
살면서 주운 말
[43글] 간혹 우연찮게 가슴을 울리는 말이나 문장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시쳇말로 '뼈 때리는 글'은 오래도록 강렬하게 남아 내 생각, 행동, 신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오늘 출근을 하니 책상 위에 빼빼로가 한통 놓여있다. 팀원 중 하나가 두고 간 듯한데, 달력을 보니 다음 주 월요일이 빼빼로데이다.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따뜻한 커피와 빼빼로를 함께 먹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오늘 아침도 든든하게 시작한다. 빈 박스를 버리려다 보니 박스에 '어떻게 맨날 잘해요'라고 쓰여있다. '힘내', '파이팅', '넌 할 수 있어' 등의 더 많은 요구를 함의한 뻔한 응원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저 한 문장의 메시지일 뿐인데,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너 할 만..
2024.11.11 -
늦은 경험이 주는 것
[42글] 살면서 참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쯤 해봤음직한 것도 좀처럼 기회가 되지 않아서 처음 겪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음식의 경우 갑자기 유행을 타는 두바이 초콜릿 같은 생소한 음식이 아닌 이상 누구나 먹어봤음직한 것도 '내가 왜 이걸 처음 먹어보는 거지?' 하는 의외의 경험들이 그렇다. '대한민국 이 좁은 땅덩어리에 여기를 처음 가본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는 유명한 지역이라 일부러 찾아가기도 할 만 한데 말이다. 강원도 속초, 강릉은 숫하게 다니면서 그 아래 주문진은 재작년에 처음 가봤고, 작년에 방문한 여수도 그랬다. 아, 놀랍게도 동대문 DDP도 작년에 처음 가봤다. 지난주에 마포에서 광고주 미팅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처음 와..
2024.11.10